1.

 

  김진호 선생님과 집 방향이 같아 한 지하철에 타게 되었다. 그 분이 종교학을 공부하신다는 것(지금 와서야 네이버 두들겨서 제3시대그리스도교 연구소 연구실장이시고 정확히는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년 인권연대에서 종교인권상을 받으셨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혼자 걱정했다. 다행히 가는 내내 선생님이 배려를 많이 해 주셔서 즐겁게 올 수 있었다.

 

  피차 처음 보는 사이에 단둘이 지하철을 탄다거나 하는 어색한 상황에서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잘 유도해주시는 어른과 함께 있으면 죄송하기도, 고맙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의 양상은 상호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모양새를 띤다. 오늘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전적으로 맞춰 주는 대화였다. 나도 어서 낯가림과 울렁증과 수줍음을 극복해서 누구에게나 좋은 대화 상대가 되고 싶다.

 

2.

 

  S씨는 선배의 충고를 아주 진지하게 듣는다. 나랑 나이대가 비슷하고 성별도 같다. 선배들이 모두 잘해 주시긴 하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또래의 동료가 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D씨는 어떤 웹진의 편집장이었던데다가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했다. 글을 잘 쓰고 열심히 배우려 든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인터뷰글을 잘 뽑아내서 부러웠다.

 

  S씨는 매일 페이스북에 일기를 쓴다. D씨도 긴 글을 쓴다. 나는 매일 초성과 모음을 섞어 괴상한 이모티콘을 만들어 가면서 뻘글을 쓴다. S씨는 입사 초기라 뻘글을 쓰기 눈치보여서 그런 거라고, 자기는 오히려 뻘글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글을 '찍어내는' 데 바빠 일기가 됐든 뭐가 됐든 '정돈되어 보이는' 글을 꾸준히 쓰지 않는 상황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로(?)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나날이 멍청해지는 것 같다는 경각심도 한몫했다.

 

  다시 뭐라도 끄적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완성도는 상관없다. 정돈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키보드 앞에 앉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런 걸 잘못된 완벽주의라 하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