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를 위하여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황광우
출판 : 실천문학사 200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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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내내 한 장이 멀다하고 메모를 해 본 게 참 오랜만이다. 이게 꼭 좋은 의미만은 아닌 게, 메모를 하기 전에 이 책 읽기를 때려치울지 말지 십수 번씩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내내 거부감에 사로잡혀 찜찜해해야만 했는지, 내 사유의 기반이 얕기 때문에 확실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낚였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 공산당 선언>같은 책일 거라고 생각하고 빌렸는데 아니었다.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끝은 심히 미약하리라."라고 외쳐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공산당 선언을 새롭게 읽는다는 부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하나도 새롭지 않게 느껴진다. 기실 70~80년대에 운동권 조직에 몸담고 있었던 개인의 전형적인 주장만을 담고 있는 수필집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논리가 빈약한데다가 낡기까지 했다. 지적 자극이 될 만한 책을 원했는데 실망이다. 그냥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면서 수기를 읽듯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론 자체도 몇십 년 전의 사고방식이라 너무 오래되어 적용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를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고 공산주의를 옹호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질지 의문이다.(이런 말을 저자에게 한다면 화를 내겠지…….) 저자가 공산주의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부분을 읽다 보면 심훈의 '그 날이 오면'이 생각난다. 저자의 태도나 책 내용 등을 통해 대강 추측해 보면, 저자는 현실주의자보다는 순결한 이상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운동권의 전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허나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의 아름다움과 우월함은 그의 통찰이 아니라 희망사항일 따름이다.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공산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늘 올바르게 작동한다는 신뢰에 기초하고 있다. 맑스 자체가 계몽주의를 체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상적 공산주의는 온전히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맑스의 이론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경 말씀 받들듯 하는 저자의 태도 또한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남한의 운동권 집단이 줄줄이 박살난 이유는 운동에 충분한 사유가 뒤따르지 못하여 사상적 기반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바른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맑스의 이론이 정감록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이름난 철학자들이나 성인들을 은근히 깎아내리면서 맑스를 추어올리는 게 숭배가 아니면 뭔지. 특히 플라톤의 사상이 보수 귀족들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식으로 까내리는 부분에서는 울컥했다. 비호감 좌파들이 동네북이 되어 욕을 먹는 이유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이유가 다른 것 같지도 않은데, 여기에 대해서 플라톤이 해답("눈높이를 맞춰라!")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있다.

  비판적 시각을 띤 고전 가이드라인을 원한다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건조하게 시술된 공산당 선언 개론·입문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공산당 선언을 해석한 책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절대로 잘 쓴 책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저자에게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잔뜩 태클을 걸어 두기는 했지만,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과 병행해서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 책 자체가 70~80년대 운동권의 시각에 치우쳐 기술되었기 때문에 본문 중간중간 삽입된 현대사적 사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나저나 책에서 이 대목을 읽고 식겁했다. 저자한테 진심으로 묻고 싶다. 본문 200쪽에 있는 이 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거냐고.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하다. 내가 알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전문적인 판단은 역사가에 맡기더라도, 40만명이 봉기하여 죽어간 동학농민전쟁, 4백만 명이 쓰러져 간 한국전쟁, 5백만 명이 궐기한 6월대항쟁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중적 항쟁이었음을 나는 감히 강조하고 싶다.

  어, 저기, 한국전쟁은 열강들 사이에 한국이 재수없게 낑겨서 새된 전쟁 아니었던가; 한국전쟁에 대중적 항쟁으로서의 면모가 있나? 어딜 봐서?; 설마 소작인들이 지주들 전부 때려잡고 뭐 그랬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민중 항쟁 운운하는 건 아니겠지?

  이게 어딜 봐서 대중적 항쟁이야…….

  만약 한국전쟁 당시 좌우(?)로 나뉘어서 서로 죽고 죽이고 척을 지게 된 걸 가지고 대중적 항쟁 운운하는 거라면, 난 저자의 역사 의식을 의심해야겠다. 민족사의 비극을 대중 항쟁으로 승화시킨 사람은 또 처음 봤다.

  * 2009년 7월 9일 작성. 일부 수정. 글이 격한 걸 보니까 내가 이 때 화가 좀 많이 났던가 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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