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난 월요일에 학원에서 배운 표현인데, 이렇게 일찍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다. 나에게는 애인이 하나 있었는데, 근래 들어 그 사람과 이런저런 문제가 생겼다. 나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기 위해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선수를 쳐서 먼저 날 차 버렸다. 어차피 다른 사람과 만나 볼 생각이었으니 잘 되었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 그러니까,

  오늘 알바를 잘렸다. 아주 멋지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다.

  내가 하던 일은 DB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스팸전화를 받아야 하는 불운한 사람들의 목록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엑셀로 보기 좋게 정리하는 작업─이었는데, 앞으로는 외부에서 DB를 사 올 테니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소한 한 달,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일주일 전에는 통보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억울함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해고 통보를 듣고 돌아온 직후 옆자리 동료 언니에게 네이트온 대화를 걸었다. 얼굴에는 허무한 웃음을 걸고 대화창에 키읔을 마구 써 가며 나 잘렸대요,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대요, 라고 하니 언니가 더 울상을 지었다. "ㅇㅇ씨, 지금 웃을 때가 아니잖아요!" 그치만 마구 쌍욕을 뱉어 가며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올 뿐. 노동부에 신고하겠다느니 악담을 늘어놓긴 했지만, 근로 계약서가 없다. 비정규직의 설움이 이런 건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지금 드는 생각은 대충 이런 것들.

  1. 그래도 당분간은 좀 쉴 수 있겠네.
  2. 이력서 다시 쓰는 거 지겨운데.
  3. 알바몬 뒤지기도 지겹다.
  4. 어차피 자를 거면 지난 주에 그따위로 지랄하지나 말던가.
  5. 사장이랑 이사랑 사이좋게 손 붙잡고 고자나 됐으면 좋겠다. 나이 삼십대 초반에 남성의 자존심과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공포를 한껏 맛보길 간절히 기도해야지.
  * "고자나 돼라!"는 내가 정말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남자사람들에게 쓰는 가장 심한 욕이다-_-

  인생 공부 한 번 지저분하게 한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자리에서 챙기면서 비참한 기분을 양껏 느꼈다. 영업사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그만두면, 사장은 잡코리아에서 이력서를 뽑아 옆자리 언니에게 전화를 돌리라고 시키곤 했다. 사원들이야 어찌되건 물건만 팔아먹으면 그만이라는 심산이지. 사원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회사 건물 나올 때에는 나름 악에 받혀서, 효과도 별로 없는(열에 하나, 둘 정도?) 전기 절감기를 파는 회사가 있다고 피디수첩이나 불만제로같은 곳에 신고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괜한 곳에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목요일이 월급날이다. 언니와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기로 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좀 쉬다가 학원 가야지. 그리고 나는 되도 않는 영어로 열심히 회사 뒷담화를 늘어놓겠지. 조금 우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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