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사장에게 된통 깨졌다. 할당량을 다 채우고 할 일이 없어서 트위터 창을 켜 놨는데, 사장이 모니터를 보더니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소리만 하는데, 사장은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라고, 왜 말을 못 하느냐고 날 계속 몰아세웠다. ㅇㅇ씨가 할 일이 없어서 그랬어요, 라고 옆자리 언니가 날 변호했다. 그러면 내일이나 모레에 해야 할 것을 당겨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난리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잘한 것도 없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일을 너무 빨리 하는 바람에, 내일 모레 해야 할 일들을 그 날 다 해치웠다는 거지.

  아무튼 쌍욕 빼고 들을 만한 말은 다 들었다. 말로 얻어맞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저혈압이긴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쓰러졌던 적은 없었는데, 사장이 가고 나자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갔지만 헛구역질만 나오고 무엇인가를 게워 올리지는 못했다. 그 날 이후 오늘까지 이틀 동안 회사에서 온통 날을 세우고 지냈다. 사장이 내 옆으로 올 때마다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내가 곱게 자랐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생각해보니 집에서도 큰소리를 들을 일이 없고, 잘못을 했어도 부모님께 맞은 적이 없다. 폭력(?)에 내성이 없는 것이다.

  내 손이 빨라서 해야 할 일을 너무 빨리 끝내는 게 문제라면 일을 천천히 하면 되겠지. 하지만 할 일이 없는데 일하는 척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간을 죽이느라 엑셀창을 띄우고 마우스 휠만 냅다 굴리고 있는데 이사가 어슬렁거리며 우리 쪽으로 왔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했던 모양인지, 나와 언니를 붙잡고 친한 척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 제대로 안 한다고 트집 잡히는 게 싫어서 이야기를 대충 받아 넘겼는데, 말본새가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네 나이 때가 가장 좋을 때다."
  "왜요?"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야. 스물셋, 스물넷일 때가 가장 좋은 거야. 스물다섯 넘으면 확 시든다?"

  "우리가 몇 년 전에는 정말 잘 나갔었거든. 그 때에는 절감기 말고 다른 거 팔았었어."
  "콘도 회원권 파셨다면서요?"
  "그 때에는 사장님이 한 달에 2천만원씩 벌고, 나는 천만원씩 받았었지. 그 때 한 번 부산으로 출장을 갔는데, 나이트에 가면 서울에서 돈 잘 버는 사람들이 와서 돈 잘 쓰고 가니까 여자들이 그렇게 자지러지면서 좋아했었어. 테이블에 양주랑 안주 쫙 깔아 놓고. 그 때 참 좋았는데."

  아, 예. 그러십니까.

  퇴근길에 언니가 귀띔하기를, 콘도 회원권으로 사기를 쳤던 업체가 시사매거진2580에 나왔던 적이 있노라고, 이 회사에서도 그런 걸 팔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사는 어린 여자애들 두 명을 앞에 앉혀 놓고, 사람들 등쳐먹은 돈으로 유흥을 즐겼던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았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따지고 들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다. 말도 안 되는 서울 중심주의부터, 여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비뚤어진 시선까지. 여자가 크리스마스 케이크라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상스럽고 천박하다.

  학교는 그나마 상식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던가 보다. PC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배척당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PC하지 못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사람 밑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는 내가 너무 유난스럽다고 핀잔을 준다. 저것보다 더한 인종들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부터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한다. 휴학하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사회에 나갔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웠을테니. 저렇게 천박한 사람들이 크지도 않은 사무실에서 사장이니 이사니 본부장이니 직급을 나누는 것도, 막 들어온 신입사원들에게 대리 직급을 붙이는 것도 우습다. 효과도 별로 없는 전기 절감기를 팔아서 관리비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기는 것은 또 어떤지. 나는 그런 회사에서 절감기를 살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목록을 뽑는 일을 하고 있다. 사기 행위에 동조한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기분이 확 가라앉아서 불쾌감을 곱씹고 있자니, 사장이 옆에 오면 몸을 굳히던 내가 정말 바보같이 느껴졌다. 애초에 사장 이하 임원들은 내가 무서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경멸하는 인종이었던 것이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 볼 사람들도 아니고, 내가 진심으로 응대해야 할 만큼 깊이가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사장에게 깨지는 동안 울음을 참으려고 꽤 애썼고, 성공했다. 일 끝나고 언니랑 술 마시면서 조금 울긴 했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서는 울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울어 버리면 사장이 뭘 잘했다고 우느냐고, 여자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게 싫었다. 그런데 내가 굳이 자존심을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사장은 내가 어린 여자애인 이상 날 존중해 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등쳐먹은 돈을 나이트에서 뿌린 사람한테 뭘 바라겠어. 사장이 아니라 이사가 저런 말을 한 건데 왜 싸잡아 욕하느냐고 하면 할 말 없다. 내 눈에는 다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보인다는 말밖에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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