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4년 겨울부터 이 날만을 쭉 기다려 왔다. 버킷리스트를 한 줄 지워버린 기분이 든다.


2. 브래드 리틀의 팬텀은 무시무시하고 집념에 차 있었지만 무척 애달프기도 했다. 몇 번 음정이 나간 게 아쉽긴 하지만, 별로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시종 에너지 넘기는 연기를 선보였다. 브래드 리틀이 1997년 이후 팬텀과 라울을 2000회 이상 연기한 '베테랑'이라는 걸 알고 나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 지난 2005년 내한공연 당시에도 팬텀을 연기했다고 한다.


3. 하지만 클레어 라이언의 크리스틴은 기대 이하. 크리스틴이 본디 의존적이고 나약한 인물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징징거렸다. 뮤지컬을 시작하기 전에 오페라 무대에 선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치고 노래를 잘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울음소리를 섞은 바이브레이션을 남용했다는 것 외에는 인상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크리스틴이 이래서야 코러스 걸에서 오페라 하우스의 디바로 단숨에 올라서고, 몇 년만에 다시 만난 소꿉친구를 사랑에 빠뜨리고, 외롭게 숨어 지내던 천재 음악가의 마음을 빼앗는 세기의 프리마돈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쉬울 따름이다.


4. 연출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특히 시각적 측면에서 그렇다. 좁은 무대 안에서, 더군다나 그 악명높은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오버쳐 연주되면서 샹들리에가 올라갈 때에는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 오페라 극장의 구석구석을 다 꿰고 신출귀몰하는 팬텀이 주는 공포를 표현한 마술과 음향 연출, 사람들이 철창을 타고 내려와 지하 미궁을 침입하는 마지막 장면 연출도 좋았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세 가지 장면, 그러니까 후줄근한 경매장이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의 모습을 되찾을 때, 샹들리에가 관객석으로 떨어질 때, 지하 미궁의 안개 속에서 촛불이 솟아날 때를 멋지게 표현해 주어서 고마울 정도였다.


5.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대체로 빠른 템포로 편곡을 했다는 것. 로맨틱하든 슬프든 신이 나든 무조건 빠르게빠르게빠르게. 덕분에 몰입하거나 감정이입할 새도 없었다. 천편일률적이고 경박하게 들리기도 했다.


6. 나는 라울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대개 라울은 그 시기에 가장 촉망받는 남배우가 맡는 것이 관례란다. 그러면 안소니 다우닝도 몇 년, 혹은 십수 년 뒤에 브래드 리틀처럼 팬텀을 연기하게 될까?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정점을 찍기 전에는 팬텀을 연기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말인즉슨 팬텀으로 정점을 찍은 뒤 조금씩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


7. 돈 열심히 모으고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일단 브로드웨이 찍고 런던 웨스트엔드에 가서 본토 공연을 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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