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오자마자 쌀 씻어서 안치고 씻고 빨래했더니 힘이 쭉 빠진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고기는 밥이 다 될 때까지 다 녹지도 않았다.


2.


  또 졸았다. 환장하겠네.


3.


  석 달쯤 전, 지인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무척 젊은 나이였다. 소식을 듣고 다같이 모여 내려간 상갓집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교류가 별로 없던 사이라 사실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영정 사진 앞에 섰을 때에도 그랬다. 페이스북,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뜬 이름으로 말을 걸면 금방 답장이 올 것 같다.


  며칠 전에는 타임라인에서 종종 보이던 트위터 유저가 의료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생 참 덧없다 싶으면서도 내게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칠 경우를 생각하게 됐다.


  죽을 날짜를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 주변 정리를 싹 하고 나서 죽을 것이다. 책상 구석에 처박혀 있던 오글거리는 일기장이 사후에 공개되는 건 사양하고 싶다.


  한참 동안 소식이 닿지 않았던 사람들, 어떤 집단 안에서 만난 게 아니라서 일대 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듣고 놀라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컴퓨터에도, 핸드폰에도 비밀번호를 걸었고 트위터는 프로텍트 계정으로 돌려 놓았기 때문에 내가 죽고 난 뒤 지인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내 죽음을 알리기는 힘들 것 같다.


  밥을 먹다가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기자가 죽으면 홈페이지에 부고 뜨나요?"

  "응. 그런데 왜?"

  "요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안 죽으면 되잖아."


  그게 정답이긴 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다는데, 정작 나는 죽고 난 이후의 일을 거의 매일 상상하면서도 하루를 가치 있게 보낼 생각은 하지 않으니 대체 무슨 경우일까. 내가 느끼는 공포라는 게 실은 죽음의 개념을 처음으로 학습한 어린아이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몇 살이니,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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