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미리 컴퓨터를 켜 놓고 저녁을 챙겨 먹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제 간담회 내용을 복기하든 공부를 하든 하려 했는데 침대에 쓰러져 푹 자고 말았다. 사방팔방에 불은 다 켜 놓은 채. 조금 황망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베개에 머리 대면 또 잘 테지만, 뭐라도 할 수 있던 아까운 세 시간을 허공에 흘려보낸 건 아쉽다.

 

2.

 

  현상을 보다 멀리, 거시적으로 보기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하나만 콕 찝어 물고 뜯는 버릇이 들었다는 의심이 든다. '신문의 행간을 읽는다'고 하지. 트위터용 단문쓰기의 편리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글쓰기를 멀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술자리에서 과 친구(남자)들에게 '씹선비'라는 말을 들었다.

 

  옆 테이블에서 아동 포르노 단속과 교복 취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랑 ㅇㅇ이(다른 여자친구)는 씹선비니까 너희랑은 이런 얘기 못하겠다!"라고 뜬금없는 말이 날아왔다. 1학년 때 내 옷차림을 보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건네던 놈한테 각 잡고 정색했기 때문인가보다. 내가 몹시 분노했던 것과 별개로 이 일을 그냥 묻어 두었지만 우리 과 남자들은 입이 싸니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겠지.

 

  저 말도 안 되는 라벨링에 울컥하긴 했지만 그냥 허허 웃어넘겼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네가 그 때 나에게 한 말은 성희롱이었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그저 나를 성적으로 소비하고 싶어했다는 데서 무척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너의 옆에서 짧은 반바지를 입고 술맛을 돋구는 사람이 아니다. 난 여기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도 없다. 너는 내가 무엇에 대해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뭐가 됐든 미안하다'는 식으로 어물어물 넘어가기만 했다. 내 모든 감정은 내가 성적인 화제를 다룰 때 취하는 태도와 별개의 문제다. 성희롱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와 성적 엄숙주의를 뒤섞어서 한 덩어리로 만들면 곤란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단어를 소비하며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져 저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 시끄러운 상황에서 적당히 위트를 섞어서 다른 사람의 술맛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해 가며 조리 있게 내 기분을 전달한다? 도저히 무리다. 내 능력 밖이다.

 

4.

 

  20대 여성이 섹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에는, 커밍아웃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그에 버금가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편하다. 다만 욕망을 긍정하며 마치 저녁 메뉴에 대해 이야기하듯 섹스를 화젯거리로 삼을 수 있을 만한 대화 상대가 매우 적다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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