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견학하다.

  안쪽이 보이지 않게 높이 쌓인 담벼락, 담벼락 위를 수놓은 철조망, 외부와 앞마당을 격리하는 무거운 미닫이 철문과 작은 여닫이 철문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대공분실 건물은 꽤 괜찮은 모습으로 지어져 있다. 1호선을 타고 지나다니면서 몇 번을 보았는데도 대공분실인 줄 몰랐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3차 희망버스 타러 갈 때 남영역에서 내려서 소집 장소로 갔는데, 남영역 플랫폼에서 대공분실 건물이 바로 보인다.) 잔디와 백일홍으로 꾸며 놓은 앞마당은 산뜻하고 예쁘기까지 하다. 기계실, 쓰레기 소각장 같은 별 것 아닌 장소에도 반듯한 벽돌로 멋을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마당 옆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다. 예전에는 바베큐 그릴도 있었다고 한다.

  남향으로 지어진 정문 쪽의 온갖 구조물은 수사관들을 위한 '인간의 공간'이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곳에 작게 뒷문이 나 있다. 여기서부터는 '짐승의 공간'이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처맞아야 했던 고문 피해자들을 위한 공간. 익명의 피해자에게 이입하여 상상해본다. 눈이 가려진 채 끌려와 몇 대 맞고, 공간감을 왜곡시키는 나선계단을 손잡이도 잡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로 올라가고, 다시 몇 개나 되는 좁은 복도와 문을 지나면 자신이 몇 층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피해자들이 추후에 진술한 내용은 각기 달랐다. 8층에서, 혹은 12층에서 고문을 당했다고들 이야기했다. 하지만 고문실은 5층에 모여 있었다.

  얼핏 보면 복도식 아파트처럼 생긴 5층은, 비상구와 고문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똑같이 생긴 철문이 줄지어 있다. 철문에 달린 어안렌즈는 밖에서 희생자를 관찰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방음벽 때문에 소리가 새어나가지도 못하지만, 혹시라도 고문실 여러 개의 문이 동시에 열렸을 때를 대비하여 문이 지그재그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희생자들이 다른 고문실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70년대 당시로서는 최고급인 일제 타일로 장식된 고문실 안에는 양변기와 세면대, 욕조, 침대가 있다. 건물을 짓는데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욕조는 희생자가 몸가짐을 쾌적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소도구가 아니다. 양변기에서 볼일을 볼 때 희생자는 자신의 '적'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하릴없이 무너지는 순간을 여실히 드러내어야만 한다. 그 때 희생자도 무너진다.

  방 여기저기에는 희생자를 배려(?)하는 깨알같은 요소가 숨어있다. 희생자들이 5층에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2중 창문은 머리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작고 좁다. 형광등은 철망으로 막혀 있다. 혹시라도 희생자가 자해해서 다칠까봐. 같은 맥락에서 책상과 의자도 볼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으니 머리아프게 날짜를 셀 수 없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언제라도 막을 수 있다. 방 안 조명은 바깥에서 켜고 끌 수 있다. 벽과 천장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CCTV가 달려 있다. 완벽히 통제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거물을 위해 따로 마련된 VIP룸은 일반 고문실을 두세 개 합쳐 놓은 정도의 크기이다. 김근태가 여기서 고문당했다. 고문 기술자이자 유도 유단자인 이근안은 여기서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온몸의 관절을 빼고 전기고문을 했다.

  어딘가의 2~3층짜리 대공분실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모작이고, 다른 대공분실은 학교 건물처럼 밋밋하게만 지어져 있다고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이야말로 악마적인 걸작이다. 인간이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고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교활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물이다. 인간의 공간과 짐승의 공간을 넘나드는 내내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빈 공간 하나 허투루 쓰이는 법이 없는, 악의에 찬 공간 분할.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 걸작을 한국의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직접 설계했다. 그러나 김수근의 이력 어디에도 이런 끔찍한 건물을 지었다는 말은 없다. 적어도 서정주가 친일 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하기라도 하지, 김수근이 이런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은 많지 않다. 치욕은 사라지고 명예만 남았다. 과연 그는 자신이 남의 손을 빌어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꽃같은 목숨들에게 속죄하며 죽어갔을까? 그의 이력에서 대공분실이 깨끗하게 삭제된 걸 보면, 적어도 그 유족과 제자들은 이 이력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본인은 어땠을까.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서정주처럼, 독재 정권이 언젠가 끝장이 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김수근은 1986년 6월에 죽었다. 민주화 세력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꼭 1년 전이다.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속죄할 기회도 없었을까?

  김수근이 생전에 공간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평생 속죄하고 사과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국가의 권위를 빌고 핑계거리를 얻어내어 평생 자신이 연구한 바를 아낌없이 이 건물에 쏟아부었을 것이라고.

  건축가이기 전에, 과학자이기 전에, 일단 사람이어야 한다. 기술의 진보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래야 한다. 김수근의 걸작을 보며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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