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수업을 듣다가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개인이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건 어쨌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팔자에 따라 타고나는 거라고 말한 S언니는 사방에서 정신없이 공격을 당했고, 미국에서 마르크스 수업을 들었다는 타과생이 그나마 S언니를 변호했다. 슬픈 얘기지만,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의 가치는 돈으로 결정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잠재되어 있는 탁월성을 끌어내도록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정의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체주의를 차용했다. 서사적 자아는 모든 사회 구성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완전한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정치적 감수성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해서 대통령이 나랏님이 되는 건 아닌데.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했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할 동안 이명박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왜, 이번에 지진 난 건 천황 때문이라고 하지 그래. 기껏 간신히 불붙은 복지 논쟁은 200년 전의 공리주의에서 머무는 수준에 불과하다. 연대 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은 엿 바꿔먹으려 해도 없다. 무상복지 예산을 다른 좋은 곳에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의사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이 와중에 착해빠진 대학생들은 자기가 못나서 취업을 못하겠거니 생각하고 열심히 스펙을 쌓으며 그 일군의 대학생 무리에는 나도 들어간다. 가난이 원죄라는 말이 맞다. 어쩌면 이리도 적절할 수가. 가난한 건 다 너희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복지는 시혜의 수준에만 머물 수밖에 없어요. 징징 짜거나 하지 말아요. 불평은 이중의 죄악이니까요. 그렇죠, 어린이 여러분?

  행복하냐구요? 네, 행복해요. 절 사랑하고 제가 사랑하는 애인이랑 오래오래 이야기해도 화젯거리가 떨어지지 않는 게 행복하고 밥이 맛있는 게 행복하고 공부가 재밌는 게 행복해요. 근데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안 행복해요.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사실 전 대학원에 몹시 가고 싶답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를 공짜로 다닐 수 있는 기회는 이제 한 번밖에 남지 않았어요. 집에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바짝 공부해서 얼른 취업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더 공부하겠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학교에 한 학기 더 다녀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것도 미안해 죽을 것 같은 마당에. 돈이 없어서 대학에 못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감사한 줄 알라고요? 사람이 어떻게 아래만 보고 사나요. 더 고차원적으로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드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하지 않은가요? 세상에,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그냥 감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면서요. morally strong한 인간이 나타나 일탈을 꾀하고 구성원의 인정을 받으면 역사가 진보한다고 했다면서요. 우리는 이렇게 자위해요. 엄마 내가 나중에 집도 사 주고 차도 사 줄게. 그럼 엄마는 차 몰고 너네 손주들 데리고 놀러다니면 되겠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 식구는 집을 옮길 때마다 서울 외곽으로 밀려나가고 있어요. 방 세 개 딸린 4500만원짜리 전셋집을 구하려면 그 수밖에 없거든요. 어찌어찌 취업을 한다고 쳐도 제가 돈을 모을 수 있을까요?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행복하냐구요?

  그런 건 물으시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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