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 1 - 여명편
국내도서>소설
저자 : 다나카 요시키 / 윤덕주역
출판 : 서울문화사 200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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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카 요시키는 <은하영웅전설>에서 노골적으로 라인하르트의 수려한 용모와 군사적 감수성, 어린 나이, 야심을 부각시키며 독재자가 되기 위한 그의 발걸음을 옹호하는 듯하다(단정적으로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1권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노쇠한데다 정사에도 시큰둥한, 다시 말해 '능력이 없'는 현 황제 프리드리히 4세와 같은 인물은 황제의 자리에 남을 자격이 없다. 또한 그의 펜이 그려내는 민중은 밥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 상관없다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구는 충실한 신민(은하제국)이거나, 화려하기만 할 뿐 알맹이가 없는 연설과 미디어에 선동되어 대의 민주주의의 이상과 건국 이념을 잊어버리는 우중(자유행성동맹)이다. 엘리트주의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우화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건 효율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비효율적인 제도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절충안을 내놓는 과정에서 놀라운 의견의 일치란 있을 수 없으며, 의견 수렴 과정에서 잡음은 필수적이다. 똑똑한 독재자를 필두로 한 중앙집권국가에서는 의사 결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의견이 곧 법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물론 똑똑한 지배자가 영원히 살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 세습이 답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똑똑한 지배자 아래에서 꼭 똑똑한 자손이 태어나지는 않는다. 골덴바움 황조의 말예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를 보고 환멸을 느낀 라인하르트의 행보에 일부 대안이 있다. 그는 핏줄의 세습을 거부한다. 국가 원수의 자리는 오직 능력에 의해 정해져야만 한다. 이 부분에서 라인하르트의 이상주의자적인 면모를 본다. 인본주의자인 양 웬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라인하르트 역시 인간 본성을 과대평하하긴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이을 유능한 후계자가, 아니, 그렇게 멀리 나갈 것도 없이 자기 자신조차 루돌프 1세처럼 무익한 자기과시욕과 신격화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는 점이 그렇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산재해 있으나, 어찌됐건 라인하르트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에 의한 1인 독재 체제는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 대단한 장점이며 매력이다. 그럼에도 양 웬리 쪽에 계속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내가 라인하르트처럼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층민 가정에서 태어나 운 좋게 대학 교육을 받긴 했지만, 죽을 때까지 부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고 대의민주주의 정체하에서 투표권밖에 가지지 못한 시민으로 살 가능성이 몹시 높다. 이런 내가 책 몇 권, 신문 며칠 더 읽었다고 남들을 깔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한 착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삶의 생사여탈권까지 독재자에게 넘긴다고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국가 모두에서 내가 의견을 직접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나, 적어도 전자의 정체에서는 불가침의 투표권을 얻음으로써 정치 활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피를 마시는 새>의 결말은, 비록 서사 면에 있어서는 많은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삶의 주도권을 신적인 지도자에게 내어주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나간다는 점에서 내 구미에 맞는다. 피마새와 은영전을 비교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깜냥이 안 되어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심각한 척 써 놨지만 그딴 거 없고 그냥 오덕오덕오덕오덕. <오페라의 유령>에 푹 빠져 지내던 중학교 3학년 이후 간만에 덕질에 불이 붙어서 기쁘다. 삶의 낙이 생겼다. 단편적이고 멋없는 서술 위주에다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이게 오덕들 필독서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정쟁과 전쟁 이야기로 뭇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 피마새도 그럭저럭 읽었으니, 아니, 오히려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니 은영전도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얼른 재판했으면 좋겠다. 스테이플러 자국과 대여점 딱지 때문에 지저분하고 너덜너덜한 책들이 프리미엄 붙어서 몇십만원 돈에 거래된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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