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여성들이 진정한 페미니즘을 알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해왔고 그 노력 끝에 성과가 있었다. 그런 과정과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단지 현상에만 매달려 페미니즘의 결실을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를테면 20년 전에 우리 세대가 누리지 못한 많은 것들을 지금의 젊은 여성들이 누리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라고 말한다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아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되기에 더욱 중요하다. 현대의 젊은 여성들은 20년 전 페미니스트가 문제를 제기하고 이슈화하여 끊임없이 싸우면서 이루어낸 터전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모른다' '페미니즘에 관심 없다' '그런 건 알고 싶지 않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들이 이를테면 여성으로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 뜨거운 용광로처럼 견디기 힘든 현실 속에서 차별과 부딪혀도,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남자들에게 승진의 기회를 뺏겨도, 그때도 여전히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이명희, 열림원, <미친년: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 中 예술가 윤진미와의 인터뷰

미친년 -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이명희
출판 : 열림원 2007.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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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늘 얘기하시길, "옛날 사람들마냥 남편 덕 볼 생각 말고 자립할 줄을 알아야 한다. 도저히 못 살겠을 때 뛰쳐나오려면 여자도 돈을 벌 줄 알아야 하니까." 내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던 때에는 콧방귀를 탕탕 뀌시긴 했지만. 이런 나도 페미니즘 서적을 본격적으로 뒤져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운운하며 페미니즘의 논리를 펴던 많고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아 쓰고 있으니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되거늘. 참고 살지 말고, 당하고 살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난 딸들이 과거보다는 많을진대, 페미니즘을 보는 시선은 어째 차갑기만 하다. 누구 탓일까. 어떤 문제건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백 번 맞지 싶다. 남자가 과한 짐을 짊어지고 여자가 사회 생활을 하며 불이익을 받는 건 모두 불행한 일인데, 성별 싸움을 하며 서로를 공격하느라 정작 중요한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원래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나는 무능력한 아버지에게 연민보다는 혐오와 짜증을 더 많이 느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생활의 불편만을 야기하지 않았다. 빈 지갑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교통카드를 충전할 돈도 없어서 악착같이 천 원을 만들어내 지하철역에 가는 게 싫었고, 요금이 밀려 휴대폰이 끊겼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꾸며대는 내가 싫었고, 학원비를 몇 달씩 밀리는 바람에 결국 백만원돈이 찍힌 학원비 통지서를 보는 게 싫었고, 집안 사정을 아는 학원 선생님이 수업을 공짜로 듣게 해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그래서 가장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면서 마음의 상처가 많이 치유되었다. 남의 인생에 기생하지 않고 내 다리로 땅을 딛고 서겠노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한다. 책 몇 권 읽었다고 마음가짐을 굳힐 수 있게 된 걸 보면 권위에 의지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니라 책에 매달려야 했다는 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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