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많고, 전혀 검열하지 않았다.

오로라 공주
감독 방은진 (2005 / 한국)
출연 엄정화,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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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나온 지 5년이나 지난 마당에 재발견 운운하는 게 조금 면구스럽다.

  엄정화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히트곡을 많이 부른 댄스가수'이지 배우가 아니다. 그녀의 연기가 평가절하되고 있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홍반장>에서의 엄정화는 그저 그랬는데, <오로라 공주>를 보고 다시 보았다. 딸을 잃은 슬픔 때문에 반쯤 미쳐버린 극중의 정순정을 보며 헤드폰을 집어던지고 싶었던 적이 몇 번인지. '아동 범죄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분노'는 흔한 소재이지만, 같은 재료로 끓인 국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엄정화는 가슴이 먹먹하도록 맛깔스러운 국을 끓였다.

  아이를 봐 주기로 했다가 그냥 방치하고 놀러가버린 불륜 커플, 일방통행로에서 접촉사고를 내고도 오히려 역정을 내던 양아치, 택시비가 모자라다는 민아를 매몰차게 길바닥으로 쫓아버린 택시기사, 아동 성폭행범을 변호해서 감옥 대신 정신병원에 가게 한 변호사를 살해하는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복수극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직접 죽게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죽음으로 모는 데 일조한 공범을 모조리 처단하는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수극으로만 한정하면 조금 허전하다. 속죄 드라마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순정은 정신병동에서 딸의 살해범을 죽이고 복수의 쾌감에 몸을 떨지 않았다. 대신 처연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다 목을 그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행복을 잃고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어머니의 절망이 아니라,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단죄를 읽었다. 아이를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했던 것도, 접촉사고 때문에 딸을 제때 데리러 가지 못했던 것도, 딸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도 다 그녀의 탓이라고, 그녀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책하며 죽어가지 않았을까.

  오성호는 형사를 그만두면 목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며 나름대로의 속죄를 해 왔지만, 순정이 느끼는 슬픔의 깊이에 비하면 한참 얕았다. 이혼 후 자신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고 막연히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민아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순정을 보고야 비로소 현실의 무게를 실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실의 정의와 분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가 선택한 길은 대속이다. 가까스로 죽지 않고 살아난 변호사의 자동차 휠에 오로라 공주 스티커를 붙이고 그의 뒤를 쫓는 오성호. 오로라 공주 스티커를 붙인 '성경'에 살인 흉기를 몰래 숨겨 순정에게 건넨 오성호. 살인 사건 당일 고기를 먹자고 권하는 후배에게 '사탄의 자식'이라고 핀잔을 주던 극 초반의 모습과 비교하면 극과 극이다. 죽은 딸과 이혼한 아내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굳이 복수를 완료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기던 가치 두 개─형사라는 직업과 신앙 모두를 버린 시점에서 이미 오성호는 산문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시적으로는 죽어버린 개인이다. 순정이 그랬던 것처럼 오성호도 자기 자신에게 처벌을 내린 셈이다.

  민아 친구의 엄마를 왜 죽였는지는, 한참 생각해봤지만 아직 이해가 안 간다. 딸이 가정에서 미처 누리지 다 못했던 행복을 딸의 친구에게 대신 누리게 하려고, 행복의 방해물인 계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딸을 소중하게 대할 줄 모르고 학대하는 계모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뾰족한 흉기로 그녀를 난자해 죽인 건 힘이 없기 때문일까, 분노했기 때문일까?

  권오중과 권오중의 캐릭터가 영화 내내 붕 떠 보여서 몰입을 방해했다. 비중을 조금 줄이거나, 아니면 좀 더 무게감 있는 배우를 선택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발음이 계속 뭉개져서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았고,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오성호의 정의감을 끌어올리려고 애쓰는데 뜬금없다는 느낌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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