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투표가 남긴 했지만 선거도 다 끝났고, 이 블로그에는 올 사람도 없으니 하고 싶은 말 다 써야지. 사실 단평이라는 제목은 적절하지 않다. 선거 운동 기간에 받은 인상을 써내려갔다는 게 맞겠다. 매일 학교에 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 때문이고, 수업을 듣지 않는 휴학생 신분이므로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나 질에는 한계가 있다. 판단 근거는 대자보와 현수막, 동기에게 얻어들은 자유게시판 동향 등이다.

  1. SAY

  2009년, 2010년 연달아 집권한 탓인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인상적인 공약이 별로 없다. '여러분의 학생회' 운운하는 모호한 선전 문구가 전부인 듯하다. 왜 출마했느냐고 묻고 싶다. 좀 심하게 말해서, 학생회를 동아리 정도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출마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Change4U에서 엉망으로 어질러 놓은 총학생회실을 2009년의 SAY가 다 수습했으니 이제 와서 물러나는 게 좀 억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다만 두 후보의 이미지메이킹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후보(남자)는 선한 인상의 소위 '훈남'이고, 부후보(여자) 역시 귀염상이다. 진심으로 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대 앞에 있는 대자보를 보다가 부후보가 예뻐서 SAY를 뽑겠다는 말도 들었다.

  2. 터미네이터

  포퓰리즘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소개팅 가실 때 영화표를 지원해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식겁했다. 이 밖에도 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강의를 듣게 해 준댔나, 뭐라던가. 아무튼 이 선본은 복지와 편의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 선본이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재투표 중이라 결과가 어떻게 또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저열하고 한심하다는 점에서 '제가 학생회장이 된다면 운동장을 잔디구장으로 바꾸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의 공약을 들고 나온 선본이 2천표를 넘게 받았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뜻이겠지.

  3. 하이라이트

  이름(right) 때문에 오해했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NL 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튼 내가 생각할 때에는 가장 쓸만해 보이는 공약을 내놓았다. 등록금(동결? 인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책을 메인으로 건 것이 마음에 들었다. 외국인 유학생 중에서도 가장 수가 많은 중국인 유학생을 겨냥해 현수막을 건 점이 신선했다. 재학중이었다면 이 선본에 투표했을 것이다.

  4. 샤우팅

  실은 얘들을 몹시 까고 싶어서 포스팅한다.
  공약이 모호하기로는 SAY 못지않은데다가, 자기들이 말하는 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NL계열 선본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을 끌어들여 '두 분의 희생과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진보적 학생회' 구호를 외치는 걸 보면 알만하지 않을까. 관팔이를 하면서 이명박 독재정권을 족치겠다고 나서면 정의로움에 감화된 이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리라 여기는 순진함에 한숨이 나온다. 봉숭아학당의 동혁이형 따라서 깔깔이 입고 선본 이름도 샤우팅으로 지었는데, 이게 또 전형적인 운동권 아저씨들 센스라서 촌스럽기 이를 데 없다. 더불어 군대도 안 간 것들이 깔깔이 입고 설친다고 예비역들한테 몹시 까이고 있는지라 오히려 역효과이다.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어필해보겠답시고 발악하는 주제에, "우리 빼고 너희는 다 악독한 정부 권력에 놀아나는 호구이며, 우리만이 이 어두운 학생 사회에 한 줄기 빛을 가져다줄 수 있다!"라고 착각하는 얼치기 좌파들의 전형적인 실수를 그대로 저지르고 있다는 점도 문제이다. 현수막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선본이 유권자들을 얼마나 깔보고 있는지를.


  노동자의 권리, 학생의 권리, 집회와 시위의 자유, 모두 소중한 가치이다. 다 좋다. 그런데 간과한 게 하나 있다. 2008년의 한총련 대위원회 개최와 지난 8월 15일 통일 대축전 때의 일로 운동권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는 것. 정말 집권이 하고 싶어 출마했다면 학내 여론을 계몽하고 선도하려는 듯한 오만한 자세를 취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군다나 사건의 전모를 기억하는 비대위 구성원 및 기타 학우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상황이다. 샤우팅 선본에 거듭된 테러 행위에 공분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하고, 종래에는 7,000표 중 고작 500표를 얻는 데 그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대자보를 찢거나 대자보에 낙서를 하고 입간판을 부수는 등의 행위를 옹호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별로 샤우팅 선본 쪽을 비호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다.
  결국 정의와 원칙의 실현은 사실 핑계이고, 학내 문제는 뒷전으로 한 채 정당 활동에나 충실하고 싶다는 속내를 너무 많이 드러내었다는 게 문제다. 설사 그게 본심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인상을 강하게 주면서 결과적으로 운동권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공고히 하고 말았다. 시대는 21세기이지만 그들의 머리는 20세기에 남겨져 굳어 있다. 정후보는 08학번이고 부후보는 04학번이던데, 어쩜 이렇게 센스가 옛날 운동권처럼 촌스러울까.

  운동권의 대안으로 등장한 비권은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회 의식을 드러내는 학생회는 무조건 운동권/종북 빨갱이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프레임 공격에 대항하거나 공격을 피하려면, 비권은 오로지 운동권의 대척점에 서서 반 운동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운동권과 비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세련된 학생 집단의 출현이 가능할까? 그런 학생 집단이 출현하더라도, 학내에서 지지를 얻는 것이 가능할까? 현재로서는 갑갑하기만 하다. 선심성 공약으로 대자보를 도배한 선본이 턱하니 당선되는 걸 보면.
  학생회의 첫 번째 의무는 학생의 목소리를 대신한다는 모호한 언명을 어떤 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이 부재한 포퓰리즘 공약의 남발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현재 존재하는 불편함과 부조리함을 개선하는 공약을 내거는 게 맞다. 당장 대학생 신분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사소한 이득은 부수적이어야 한다. 포퓰리즘과 학생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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