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유쾌한 과일하야시 마리코
상세보기

  반쯤 야설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성행위 묘사가 노골적이기 때문에, 왜 출간 당시에 이 소설이 사회문제씩이나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우리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나라가 일본인데, 이 책의 출간년도는 1996년, 근 15년 전이다. 유부녀가 그저 지루한 일상에 질렸다는 이유만으로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는 소설을 보고 사회 구성원들이 충분히 충격을 받을 만했다.

  당시의 사회 상황에 비추어 보면─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그 때와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도아니지만─ 마야코가 사랑받고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을 채우려고 불륜을 저지르고 다니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가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야코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짐짓 허세를 부린다. 동창들의 선망에 찬 눈길과 주위의 평판은 마야코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닐 테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이 냉소로 바뀐 다음의 삶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마음 심지가 굳지 못하다. 내가 보기에 마야코는 낮은 자존감에 '좋은 남자/남편/애인'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씌워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연약한 여성이다. 감정과 상황에 휩쓸리기 때문에 결국 불륜을 저지를 때조차 덤덤해진다. 그녀는 아기를 가지면 모든 불만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예상하지만, 그녀는 육아를 하면서도 만성적인 욕구불만에 시달리며 우울해할 가능성이 몹시 높다.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자는 서문에서 마야코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의 화신이며 억압된 여성의 성욕구을 망설임없이 분출했다고 추어올린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고 남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다가 자괴감에 빠진 가엾은 여자로밖에 안 보인다. 멍청하기 때문에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폴리아모리니 모노가미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꼬는 수많은 찌질이들을 볼 때처럼 짜증은 나지만 미워할 수는 없다. 내게도 마야코와 같은 면이 분명히 있으니까. 욕망을 직시하고 가지치기하는 방법도, 자기 자신을 아끼는 방법도 아직 잘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