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겸허함을 알게 되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사소한 순간은 미처 인식하지 못할 때 극적으로 다가와 뺨을 후려친다. 촉매는 주변인이 될 수도, 롤모델이 될 수도 있다. 고개가 모로 꺾일 것 같은 아픔은 쉬이 가시지 않고 뺨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손톱을 깨물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자기 통제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겸허함을 느낄지, 좌절감을 느낄지의 경계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골치아픈 사고방식의 관성에 이끌려서, 요 며칠 동안 좌절감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겸허함을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식으로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면 된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 밖에는 수많은 은하가 있고, 은하를 삼켜버릴 것처럼 거대한 별도 있을 테고, 광활한 공간 어딘가에는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는 나는 내 눈썹을 기어다니며 각질을 뜯어먹는 모낭충보다도 더 미력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극히 의도적이고 예측 가능한 좌절을 불러일으키므로 충격이 그다지 오래 가지 않는다.
  전자의 좌절을 후자의 좌절로 돌려 중화하려고 꽤 애써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애매한 어휘를 남발하며 일기를 써 보아도 속상한 기분만 점점 눈덩이 굴러가듯 불어날 뿐이다. 내 자존감은 열등감과 '쫀심'이 예쁘게 포장된 속 빈 강정이었다는 사실을 거푸 깨달아봤자 별로 기쁘지도 않고, 나아질 것도 없다.

  2. 생각을 하자.

  3년 전 여름방학, 나는 논술 수업 시간에 글의 개요를 짜다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내 글에는 알맹이가 없어!" 3년 전에 비해 지금도 그다지 나아진 점은 없다. 그나마 요즘에는 책을 많이 읽고 있지만, 독서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 순간 독서도 중노동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내 손을, 내 입을 빌어 남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나불거린다. 물론 내 눈이 아닌 남의 눈을 빌어 해석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서야 곤란하다. 독서, 토론, 성찰, 견문, 아량. 전부 내게 필요한 것들이다. 책을 읽자. 많은 것을 듣고 보자. 생각을 하자. 생각을 많이 하자. 그리고 남이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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