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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이번에야 읽었다. 영화보다는 소설이 훨씬 낫다는 소리를 듣고 기대를 좀 했는데 실망스러웠다. '중혼'이라는 나름 파격적인 소재를 끌어다 쓴 것치고는 썩 전복적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심심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논문을 읽는 느낌이었다. 책 말미의 레퍼런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느낌이 더욱 두드러진다. 인아는 폴리가미의 당위성에 대해 한 페이지, 반 페이지씩 설교를 늘어놓고, 덕훈은 제대로 반론조차 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결국 참으로 비루해 보이는 한 마디만 내뱉고 만다. "넌 왜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말이 되는 것처럼 하냐!"
1학년 때 들은 역사 수업에서였던가. 일부일처제는 능력 없는 비루한 수컷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꽤 그럴듯했다. 자연 상태에서는 능력 있는 수컷들이 암컷을 몇 마리씩 거느리고 사는 일이 이상하지 않다. 강인한 수컷은 강인한 유전자를 퍼뜨리고, 암컷들은 강인한 수컷의 보호 아래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새끼를 안전하게 키울 수 있다. 약한 수컷은 당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는데, 강한 자가 더 많이 갖는다는 룰을 깨뜨리고 약한 수컷들도 암컷과 관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어떻게 보면 무척 남성 중심적인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아는 남편을 두 명 두면서 가부장 질서를 깨뜨린다고 주장하려는 것 같은데, 어떻게든 두집살림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작가가 이것저것 끌어다 쓴 장치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여자들의 환상을 실현한 작품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아는 슈퍼우먼이다. 덕훈의 주장에 따르면, 정말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은 공들여 만드는 화려한 음식이 아닌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을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란다. 인아는 그런 요리를 하는 사람이다. 또한 덕훈이 바람을 몇 번 피우고도 인아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아와의 섹스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축구를 좋아한다. 애초에 둘을 이어 준 매개는 축구였다. 덕훈이 인아의 새 남편을 용인하는 이유는 이런 '훌륭한' 여자를 놓치기 싫기 때문이지, 폴리가미와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인아의 말에 완전히 동조해서가 아니다.
뭐 폴리가미의 당위성은 '잘난 사람이 배우자를 여럿 거느리는' 데서 비롯하니 여기까지는 봐 줄 수 있다고 치겠다. 정말 참을 수 없었던 부분은 덕훈이 인아에게 '벌을 주기' 위해 강간하듯 잠자리를 하는 장면과, '네가 내 마음을 상하게 했으니 나는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자위하며 의식적으로 집안일을 내팽개치는 장면. 물론 인아는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살림을 꾸리고 덕훈을 사랑한다. 이쯤에서 데자뷰가 느껴진다. 밥 해주고 보듬어주고 섹스해주고 '내 자식'도 낳아주는 제2의 어머니. 남성 사회의 몹시 오래된 판타지가 아니던가. 폴리가미는 알약 겉에 칠해진 설탕일 뿐이고, 알맹이는 설탕 밑에 숨어있는 쓴맛나는 약이다. 나한테는 이 텍스트가 전복적인 척하면서 판타지를 가감없이 펼쳐대는 것으로 읽힌다. 욕망에 솔직한 게 차라리 낫다.
까다 보니 엄청 길어졌네. 쩝, 논리도 12개월 할부 구매할 수 있으면 좋겠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