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은비 사건에 분노하는 위선자들에게 분노하며 씀.

  댓글을 달려다 글이 길어져서 트랙백한다. 본문의 댓글과 추천평에서 글쓴이가 거의 조리돌림을 당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지라 몹시 안타깝긴 한데, 방문자들이 글쓴이의 분노에 도리어 분노를 느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글쓴이는 연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끌어와 동일선상에 놓으며 채식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고 있다. 동물 학대와 비인간적 도축은 분명 '동물의 권리'라는 화제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다. 글쓴이가 의도했던 바는 아마 인간의 쾌락을 위해 동물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육식을 위한 비인간적 도축과 '은비 사건'이 다를 게 무엇이냐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좀 더 파고들어가 보면 두 사건은 원인에서나 해결 방안에서나 무척 다른 양상을 띤다.

  '은비 사건'에서 고양이 은비는 우연히 피의자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십여분을 폭행당하다 추락사했다. 이 사건을 보며 사람들이 경악하는 지점은 폭력 그 자체이다. 또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부분 역시 피의자가 자신보다 연약한 상대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했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동물과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그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여러 연쇄살인마들의 사례에서 쉽게 알 수 있듯, 동물에 대한 폭력은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공산이 무척 크다. 실제로 경찰서에서 피의자는 고양이의 주인과 경찰에게까지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며, 뉴스 인터뷰에서 피의자는 남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에 술을 마시고 화풀이를 하기 위해 고양이를 폭행했다고 말했다. 논리를 조금 비약해 보자. 오피스텔 복도에서 피의자의 눈에 띈 것이 고양이가 아니라 체구가 작은 여성, 혹은 어린아이였다면, 과연 그들은 피의자의 무차별적인 폭행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이와 달리 비인간적인 공장형 도축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부분은 도축 과정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폭력이 아니라, 왜 그러한 축산 기업이 그런 시스템을 선택할 수밖에 없느냐 하는 지점이다. 비인간적으로 도축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한때 채식주의자가 될 지 말지를 고민했던 입장에서, 비인간적인 도축 시스템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논지 자체에는 공감한다. 다만 글쓴이가 도축 과정에서의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한다면, 개인의 생명 윤리보다는 자본주의와 (기업의) 경제 논리의 병폐가 맞물려 탄생한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 설득력있을 것이다. 기업이 비인간적 도축 시스템을 채택하는 이유는 그 편이 훨씬 이익이기 때문이다. 광우병은 축산 기업의 경제 논리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지 않겠느냐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모든 소비자들이 마음에 곧장 와닿지 않는 모호한 신념에 입각해 윤리적 소비를 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글쓴이가 댓글에서 언급한 '인도적인 과정으로 생산된 유정란'만 봐도, 슈퍼에 널린 계란에 비하면 턱없이 비싸다. 돈을 더 주고 윤리적 소비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여유로운 가정이 과연 얼마나 될까? 괜히 미국 저소득층의 비만 인구가 높은 게 아니다. 마트에서 파는 계란이 밝은 불빛이 켜진 우리에 갇혀서 잠도 자지 못하고 모이만을 쪼아먹는 닭이 생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비자가 그것을 사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편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설사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식육을 한다 할지라도, 글쓴이의 주장처럼 '위선자'로 싸잡아 욕을 먹을 이유가 없다. 무지는 죄가 아니다. 글쓴이가 진정 동물의 권리 문제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면 논점을 일탈한 글을 이토록 강경한 어조로 써서는 안 된다.

  * 2010년 6월 30일 오후 5시 30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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