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청심환은 안 먹었다. 노동청에 가는 지하철을 타고, 이 시간에 회사에 갔으면 앉아서 일이나 하고 돈이나 벌 수 있을텐데, 대체 왜 우리 집에서 한 시간 가까이 떨어진 곳까지 귀찮게 진술을 하러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억울해졌다. 게다가 이번 회사에서는 점심밥까지 살뜰하게 챙겨 먹여준다. 진정서를 낸 지 20여일이 지난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진술서를 쓰러 가는 마당에 다 때려치우고 싶어하는 것도 웃기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먹고 떨어지라고 할 심산이었으면 진정서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나이트 죽돌이마냥 양아치스럽게 생긴 사장 얼굴과, 못생긴 주제에 여자를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하며 이죽거리던 이사 얼굴을 떠올리니(이렇게 치사한 인간들은 얼굴로 까여도 괜찮다) 우습게도 호승심이 치밀어올랐다. 애초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돈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회복 때문에 시작한 일이다.

  지하철역 2번 출구로 나와서 한참 헤매다가 좀 어둡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근로지도과는 1층에 있었다. 사장이랑 만나서 말싸움이라도 할까봐 조금 긴장했는데, 담당 근로감독관님이 일부러 사장과 나를 따로 불렀다고, 자기도 나름 경찰이라면서 날 안심시켰다. 책상 앞에 놓인 명패에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경찰 비스무리한 직책명이 쓰여 있었다. 반신반의하면서 가져간 자료(네이트온 대화 로그)를 내밀었는데, 역시나 4월 13일에 일을 한 증거로 제출하기에는 부족했다. 대화한 장소의 IP주소를 알면 좋을 테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일한 기록이 전산에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카드로 출근 기록을 따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상반된 진술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근로감독관님이 보다 못해 힌트를 주었다.

  "전에도 아가씨같은 경우가 있었어요. 그 아가씨는 하루가 아니라 이틀분 임금을 못 받은 상황이었는데, 신용카드 회사에서 카드 사용 내역을 떼어 왔더라구요. 그 아가씨는 신용카드를 교통카드로 썼거든."
  "……아!"

  아직 학생이라 신용카드는 못 만들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나는 핸드폰에 내장된 교통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어디서 교통카드를 충전했는지, 어디서 승차하고 하차했는지 최소 3개월 동안의 기록은 인터넷으로 전부 볼 수 있다. 그 전에는 내 일거수 일투족이 전산망에 기록되는 걸 내심 찜찜하게 여겼는데, 이게 전화위복(?)이 될 줄은 몰랐다.

  "확인할 수 있어요?"
  "네. 인터넷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걸 엑셀이든 한글 파일이든, 어떻게든 문서로 만들어서 나한테 보내줘요. 팩스도 괜찮고, 이메일도 괜찮고. 직접 작성하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객관적으로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진술서를 썼다. 모르는 건 물어보면서 시키는 대로 쓰면 된다. 신분증을 복사해야 해서 주민등록증을 내놨는데, 감독관님이 민증 사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본인 맞아요?"라고 물었다. 이런 얘기를 술집에서 한두 번 들은 게 아니기 때문에, 대답 대신 잠자코 학생증을 내놓았다.

  "ㅇㅇ대학교? 몇 학번이에요?"
  "08학번이에요."
  "ㅇㅇ동에 있는 그 학교 맞죠?"
  "네, 맞아요."
  "내 후배네. 난 94학번이에요. 그 학교 경제학과 나왔어요."

  진술서를 쓰는 동안 요즘 등록금은 얼마냐, 학교가 많이 바뀌지 않았냐, 하고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 후배가 이렇게 머리를 못 쓰면 쓰나?" 하는 핀잔도 덤으로 들었다. 괜히 안심이 되어서 씁쓸해졌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민다. 결코 나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외의 장소에서 확인했다. 진술서를 다 쓰고, 이름 옆에 도장을 찍는 대신 사인을 하고 근로지도과를 나섰다. 도장과 신분증을 지참하라고 출석 요구서에 쓰여 있지만 도장은 없어도 된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역시 공부는 잘 하고 볼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반쯤은 진담으로 하는 소리였다.

  이메일로 교통카드 사용 내역도 보냈고, 당분간 귀찮아질 일은 없을 듯하다. 기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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